화랑도란?

화랑도의 역사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 화랑들의 심신 수련법으로 더욱 발전된 무예이다. 태초의 화랑도는 환국 시대부터 시초가 되어 배달시대에 소도가 있었으며 오상지도로 계율을 세웠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천지화랑과 국자랑이 있었으며 충‧효‧신‧인‧용ㆍ의 오상지도의 육기(六技)를 교육했다. 화랑육기에는 활쏘기, 풍류권, 풍류검, 월도, 봉, 창 등이 있었으나 신라 시대에는 활쏘기와 검, 창이 가장 중요한 기예로 활용됐다.

 

먼저 화랑도의 설치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삼국사기> 진흥왕 576 초봄에 처음으로 원화제도를 만들었다. 이보다 앞서 군신이 인재를 찾기가 힘든 것을 염려한 끝에 무리를 모아 함께 교유(交遊)하도록 하여 그 행의(行義)를 살펴 등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선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미녀 2명을 뽑아서 두 미녀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러나 두 미녀는 서로 질투 끝에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강권하여 취하도록 한 다음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게 했다. 그 일이 발각되어 준정은 곧 복주(伏誅)되고, 그 무리는 해산됐다. 그러한 일이 발생한 이후부터는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치장시킨 다음, 화랑이라 부르고 받들게 하자, 다시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화랑의 무리는 도의(道義)로써 몸과 마음을 연마하고 가악(歌樂)으로써 줄기며 산수(山水)를 찾아 안 가는 곳이 없었다.

 

화랑이란 신라 귀족의 자제 중에서 인물이 수려한 청소년을 뽑아 문무(文武)를 수련했던 집단으로 삼국 통일의 근간이 됐다. 화랑에 대한 명칭은 국선, 풍월주, 원화, 풍류 등이 있었으며 이를 종합하면 ‘나라의 꽃’이라는 뜻이 된다. 화(花)는 꽃이고 랑(郞)은 남자를 말했다. 이러한 화랑(花郞)은 유ㆍ불ㆍ선의 이념을 함축한 이상적인 문무기예(文武技藝)의 조직체이다.

 

또한, 화랑도의 사상 연원에 대하여 <삼국사기>를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성덕왕(聖德王) 때의 사람인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빠져나오고, 뛰어난 장사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했다.

 

그 후의 신라 사람인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는 ‘우리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교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先史)에 삼교(三敎:儒敎·仙敎·佛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했다‘고 실려 있다.

 

<삼국유사> 김유신(金庾信) 편에는 ‘김유신이 진평왕 17년(595)에 태어났다. 칠요(七曜:해, 달, 5성 또는 7성)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어 신기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가 되던 임신년에 검과 권을 닦아 국선이 되었다’라고 되어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건복 29년(612년)에 이웃 나라의 적이 한층 더 핍박해왔으므로 공은 더욱 웅대한 뜻을 나타내어 홀로 보검(寶劍)을 가지고 인박산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불을 피워놓고 하늘에 기도하니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보검에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렸다. 사흘째 되던 밤에는 허성(虛星: 28宿중 북쪽의 7宿 4번째별)과 각성(角星: 동쪽의 7宿중 첫 번째 별) 두별이 환하게 빛나면서 칼이 내려와 칼이 움직이는 듯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김유신은 화랑 중 한 사람이다. 여기서 검은 화랑도의 주 무기였다. 화랑들은 일상생활에서도 검을 차고 다녔으며 화랑도 수련에 진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랑도는 그 독특한 무사도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들의 전기를 보면 이 시대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도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무사도는 특히 화랑 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 백제를 치기 위한 원정군의 주요한 장수는 김유신을 비롯하여 그의 아우인 흠순과 품일이 있었다. 이들은 황산벌판의 싸움에서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각기 아들인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을 전사하게 하였다. 김유신은 그 뒤 672년(문무왕 12)에 그의 아들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워 패전한 끝에 살아서 돌아오자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저 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것을 왕에게 탄원한 적도 있다.

 

비록 원술은 왕의 비호로 목숨을 구하였으나 그 뒤로는 감히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으나 끝내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또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무이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에 요긴하다.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필요하다. 다른 민족의 청소년 집단이나 전사 조직과 마찬가지로 가무단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에서 노래와 춤은 명승지 순례와 더불어 놀이로서의 단결력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점이다.

 

물론, 화랑들의 수련에서 노래와 국토 순례, 그리고 춤이 어떤 실제적인 것을 떠나 다만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놀이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놀이의 사상은 직(直)과 예(禮)의 균형조화를 강조한 유교의 예악 사상과도 서로 상생하는 바가 있다. 화랑도의 인격 형성이나 세계관 형성에 놀이를 통한 단결력의 성격이 내포된 점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또한,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합하여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 수령인 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下生)한 미륵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 집단 자체가 미륵을 쫓는 무리로 일컬어졌다.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앙에 의하여 결합한 동신자(同信者) 집단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많이 만들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이야말로 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마저 나오고 있다.

화랑오계(花郞五戒)

화랑도가 신라의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근본정신은 5계(五戒)에 잘 나타나 있다. 원광법사는‘화랑오계’에 대하여 매우 강조했다. 「삼국사기」의 <귀산전(貴山傳)>을 통해 원광이 화랑 귀산과 그의 친우 추항(帚項)에게 화랑정신의 기본인 화랑오계를 전수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귀산은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어렸을 때부터 같은 마을에 사는 추항이란 친구가 있었다.
귀산은 추항에게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로 교유하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잘 닦지 않으면 반드시 치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현자를 찾아가서 올바른 도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상의하였다. 그 당시 원광법사가 수(隨)나라에서 유학하다가 돌아와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귀산과 추항은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원광법사를 찾아간 그들은 공손한 태도로, ‘속세의 우리들은 어리석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바라는 건데 한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원광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계(佛戒)로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것을 10계로 삼고 있지만, 그대들은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서 능히 그것을 감내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지금 세속에 알맞은 5계가 있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시행하라’ 하였다. 여기서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가르쳐준 화랑오계는, 즉 첫째,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하고(事君以忠), 둘째,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고(事親以孝), 셋째, 벗을 사귐에 신의로써 하고(交友以信), 넷째, 싸우는 마당에 임하면 물러남이 없게 하고(臨戰無退), 다섯째,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殺生有擇)는 다섯 가지 계명이었다. 원광은 그들에게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에 귀산과 추항은, ‘다른 것은 다 명하는 대로 받아 하겠다 오나, 이른바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아직 똑똑히 모르겠나이다’ 하니 원광법사는 다시 풀어 말하기를, ‘6재(六齋) 날과 봄과 여름 달에는 산 것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때를 가리라는 것이요.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고 함은 말, 소, 닭, 개를 말하는 것이고, 작은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고 함은 물고기가 한 입도 못 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는 오직 그 소용되는 것에만 한하고, 많은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히 삶 속의 착한 경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귀산은 다시 말하기를, ‘지금부터 법사의 계명을 잘 받들어 실수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6재날’이란 음력으로 매달 1일, 7일, 14일, 15일, 21일, 29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날은 불교의 사천왕(四天王)이 인간 세상을 돌아보며 사람들의 범행을 경계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원광법사에게서 화랑오계를 전수받은 귀산과 추항은 삶에 있어서 생활신조로 삼았다. 그 후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9년(602) 8월에 백제군이 침입해서 아막성(阿莫城; 지금의 남원 운봉(雲峰)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 이때 진평왕은 파진간(波珍干) 벼슬의 건품(乾品), 무이굴(武梨屈), 이이벌(伊梨伐)과 급간(級干) 벼슬의 무은(武殷), 비이야(比梨耶) 등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군을 반격하게 하였다. 이 싸움에 귀산과 추항에게도 아울러 소감(少監) 벼슬을 내리고 싸우도록 하였다. 신라군은 잘 싸워 백제군을 대파하고 계속 도주하는 백제군을 추격하였으나, 백제군이 패주하면서 비밀히 천산(泉山)의 연못가에 복병을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추격하던 신라군은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미리 천산에 숨어 있던 백제군의 복병이 뛰어나와 귀산의 아버지인 무은이 속해있는 후군을 엄습하였다. 이때 귀산은 큰 소리로, ‘내 일찍이 원광법사에게서, 용사는 싸움터에 이르러 물러서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거늘, 어찌 감히 달아날까 보냐.’하고 외치며 백제군 속으로 뛰어들어 백제군 수십 명을 죽이고 자기 말에 아버지 무은을 태워서 보내고는 추항과 함께 남은 힘을 다해 싸웠다.

 

이 광경을 본 신라군은 분격하여 백제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의 복병은 전멸되어 시체가 들녘에 가득히 깔리고 한 필의 말, 한 짝의 수레바퀴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귀산과 추항은 전신에 상처를 입어 돌아오는 중도에서 죽으니 이에 왕은 군신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에까지 마중을 나가서 귀산과 추항의 시체를 보고 통곡하며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그들에게 벼슬을 추증하였는데, 귀산에게는 내마(柰麻)의 벼슬을 내리고 추항에게는 대사(大舍)의 벼슬을 내렸다. 이처럼 귀산과 추항의 죽음으로써 널리 알려진 화랑오계는 이때부터 화랑도의 실천 강목이 되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에서 충과 효의 이념이 제시되고 있고, 교우이신(交友以信)에서는 청소년 집단의 전래의 ‘맹우정신(comradeship)’이 강조되고 있다. 아울러, 전쟁 시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국가적 요청에 따라 임전무퇴(臨戰無退)가 제시되었고, 그것을 불교적 정신으로 순화함에서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화랑도의 부활

화랑도나 화랑제도와 같은 훈련프로그램을 국가의 시책으로 발전시킨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시대적으로 AD 4C초에서부터 실시하여 단일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는데 그 결정적 공헌을 했다.

 

화랑도의 조직과 훈련 등은 지극히 민주적인 제도였다. 상관의 명령으로 지휘라는 하향식의 조직이 아니고 서민층에서 상류층까지 인재를 발굴하여 교육과 훈련을 시킨 것이다. 전체군주체제의 신분인 골품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의 서민층부터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신라시대 신앙들을 화랑도에 모두 흡수하였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민족에게도 없는 전통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떠한 종교나 사상적 제도에서도 화랑도 속에서는 벽이나 갈등이 없었다는 것이다. 폭넓은 인간관계, 나라사랑을 바탕으로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청년, 미래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용맹 전진하는 지도자를 키웠다.

 

국가와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지도하였으며 화랑도를 왕권의 비호와 권력의 연장수단으로 육성한 것은 아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국가의 각처에서 젊은 인재를 총동원해 당시의 정신적 지도자이던 국사나 왕사, 선사 등을 통하여 교육하고 수련하였다. 이러한 점도 다른 나라의 제도 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수행불교(修行佛敎)의 핵심인 선불교의 수행도량에서 지도를 받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신라의 화랑들은 어떠한 제도 속에서 호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진리, 정의, 평화, 행복 등의 보편적인 생활 철학을 체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힘이 바로 민족 통일을 추구하고 실천에 옮기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와 원동력은 고려시대에 와서는 중국의 건안족, 몽고족, 한족 등과 일본의 왜족들의 침입이 잦으므로 이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호국(護國) 호법(護法)의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시대에는 힘이 정의이고 정의의 논리로 통치되던 시대이다. 그런 정의의 근본과 그 시절 모든 정치의 기본은 화랑도의 힘에서 비롯됐으며 신라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