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를 통해 본 화랑도 조직은 크게 화랑, 낭두, 낭도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풍월주였고 그 밑에 부제가 있었다. 부제 아래의 화랑조직에 대해서는 8세 풍월주 문노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문노는 좌, 우 봉사랑(奉事郞)을 좌, 우 대화랑(大花郞)으로, 전방(前方) 봉사랑을 전방 대화랑으로 만들어 각기 3부의 낭도를 거느리게 했다. 그 외에 진골화랑 귀방화랑 별방화랑 별문화랑 등의 직제를 두었는데 12~13세의 진골 및 대족의 자제 가운데서 원하는 자를 뽑았다. 그리고 좌화랑과 우화랑을 각 2명씩 두었고 그 밑에 각기 소화랑 3명과 묘화랑(妙花郞) 7명을 거느린 것으로 돼 있다.
화랑이 거느리는 하부 집단인 낭두(郞頭)에 대해서는 22세 풍월주 양도공조에 그 내용이 나오고 있다. 원래 낭두에는 망두 신두 낭두 대낭두 상두 대두 도두 등의 등급이 있었는데 양도공은 대도두, 대노두를 더했고 도두 이하는 각기 별장을 거느렸다.
24세 천광공조에는 대노두는 60살, 대도두는 55살, 도두는 50살, 대두와 상두는 45살, 낭두와 대낭두는 40살까지로 한정한 것으로 돼 있다. 대도 중 입망자는 망두가 되었고 그중 공과 재주로 천거된 자는 신두가 되었는데 망두만이 낭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왕이 총애한 화랑의 부인이 낳은 화랑의 아들로 일종의 왕의 양자)만이 「입망의 법」에 의해 낭두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낭두 밑의 낭도조직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22세 양도공조에는 「국초에 서민의 아들들도 준수하면 낭도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13~14살에 동도(童徒)가 되었고 18~19살에 평도(平徒)가 되었고 23~24살에 대도(大徒)가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시 말해 연령별로 소년에서 청년기까지 각각 편제가 이루어져 있었던 셈이다. 대도 즉 성인 낭도 가운데서 입망자는 망두가 되고 신두도 되었다. 또 망두 가운데서 낭두를 뽑은 것으로 나온다. 대도는 30살이 되면 병부에 속하거나 혹은 농공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낭도로 활동하는 기간이 정해진 것을 의미한다.
풍월주를 물려준 화랑들은 상선 등의 지위를 차지하고 풍월주 위에 존재하는 자문역을 맡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풍월주의 부인들은 선모(仙母) 또는 화주(花主)로 화랑도의 운영에 일정한 역할을 했고 화랑도들의 집단인 낭문에는 「유화」가 있었던 것으로 봐서 여자들도 화랑도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화랑도 중에는 이와 같이 공식적인 편제에 속하지 않았던 사도(私徒)도 있었다.
화랑도의 활동에서도 알려진 것보다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8세 문노조에는 화랑도조직이 3부로 나뉘었고 각기 다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그중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 문사(文事), 무사(武事)를 담당했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춤과 음악), 악사(樂事), 예사(藝事)를 담당했다. 또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산천경개 유람), 제사(祭事), 공사(供事:조정의 각종 공식 행사)를 담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7세 풍월주 설원랑조에는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했고, 속세를 떠나 유람을 즐긴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했고 호탕한 기질을 가졌던 것으로 나온다. 20세 예원공조에는 선도(仙道)는 보종공을, 무예(武藝)는 유신공을 따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로 보건대 각 유파별로 전문적인 수련과정이 어느 정도 차별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24세 천관공조에는 공과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해 병부에 보충한 것으로 나온다. 천관공이 5년간 풍월주로 있는 사이 낭정은 무사(武事)를 중심으로 운영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화랑도가 전쟁 수행이나 반란 진압 같은 군사적 활동에 동원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9세 풍월주 비보랑조를 보면 진평왕 25년인 건복 25년(603년) 왕이 고구려의 내침을 막으려고 친정할 때 낭도들이 많이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담의 난을 진압한 세력은 천관공이 거느렸던 화랑도들이었다.
즉 화랑도들의 활동은 순국 무사나 도의 연마, 명산, 대천 유람, 노래와 춤 등의 활동 외에 다양한 활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회에서 언급한대로 화랑도의 조직이 주요한 정치세력이었으며 화랑도를 장악한 정치계파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추론도 가능한 것. 특히 삼국통일 과정에서 화랑도들의 종군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또 화랑도는 신라의 인재 양성기구이기도 했다. 화랑도는 다양한 문, 무, 예등 다방면의 교양을 습득했다. 12세 보리공은 15살에 화랑이 돼 토함공에게 사(史)를 배웠고, 이화공에게 가(歌)를 배웠으며, 문노공에게 검(劒)을 배웠고 미생공에게 무(舞)를 배웠다고 한다. 말하자면 화랑도는 일종의 전인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화랑도의 교육과 활동을 통해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을 골라내 조정에 천거했던 것. 화랑들은 물론이고 서민인 평민들 중에서도 발탁돼 대사(大舍)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 화랑도는 신라를 불교사회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알 수 있다. 화랑도는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다시 말해 신라는 골품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화랑도 집단을 사회화 정치화했던 것이다.
* 출처 : 국제신문(2000.9.23.)